12/16/2011

R.I.P. Christopher Hitchens


존경하는 무신론자 가운데 하나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세상을 떴다.

다른 무신론자들과는 달리 독설과 화법이 매우 직설적이어서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정말 아쉽다.

ㅜ.ㅜ 엉엉

12/12/2011

Cindy




WOD:

20 Rounds of Cindy for time

5 Pullup

10 Push-ups

15 Squats

신기록 달성! 18분 15초!

느낀점: 한달전쯤인가? 했던 운동에서 달리기(총 3200미터=2마일) 안하고 해서 엄청 빨리 끝냈음 ㅋㅋㅋㅋ 할 때 요령은 쉴 생각을 하면 안됨 ㅋ 턱걸이 끝내면 바로 업드려서 팔굽혀펴기 하고 끝내자마자 바로 스쿼트 하고 끝나면 바로 점프해서 매달려서 턱걸이 ㅋㅋ 안쉬고 계속 하면 20분안에 다 할 수 있음. 턱걸이 100개, 팔굽혀펴기 200개, 스쿼트 300개. 근데 말이 쉽지 좀 힘들었음 ;;

12/02/2011

mp3 음질에 대한 논란

http://ruliweb.empas.com/ruliboard/read.htm?main=hb&table=hb_news&num=53177

MP3와 CD音의 청음 테스트(128kbps, 256kbps)

c't The Magazine for Computer Technique // June/2000, p. 92: MP3-Comparison // 작성자: Carsten Meyer

출처: http://www.geocities.com/altbinariessoundsmusicclassical/mp3test.html
독일어 원본: http://www.heise.de/ct/00/06/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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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실험 테스트 - c't(독일 오디오 전문 잡지:역자 주)독자들의 청음테스트: MP3 대 CD

2000년 3월에 있었던 MP3인코딩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한 논란 이후에, c't 紙는 독자들에게 청음 테스트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번 실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음원에 대한 정보가 가려진 상태에서 다양한 음악을 듣고 그 음원의 정체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우리의 전문 청음가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편집진들도 새로 드러난 사실들로 당황하게 됐다. 우리는 벌집을 쑤셔 놓은 셈이었다.

유즈넷 포럼에서의 오랜 논란과, 편집자에게 날아오는 건설적이거나 혹은 거칠기도 한 편지들, 그리고 업무시간 중에 핫라인을 타고 오는 성난 메시지들로 보아 MP3 반대자들과 지지자들간의 전쟁은 테스트 후에도 결판나지 않은 듯 하다. 비판자들은 우리가 대중주의적인 견해를 내놓았다고 비난하면서, HiFi/Audio 스펙의 복잡성과 관련된 위대한 기술에 대해 논하고, MP3는 악마의 작품이라고 욕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의 명쾌한 설명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으며 오디오나 HiFi에 대한 밀교나 부두교 같은 미신을 몰아내는데 유용했다고 칭찬하기도 했고, 일부는 그저 단순히 오디오를 다양한 음질로 손실 압축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를 들을 수 있는지(또는 듣지 못하는지)를 똑바로 보여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반응에 따라 우리는 추가적인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c't紙 2000년 4월호에 싣기로 했다. 비판적인 독자들 본인에게 직접 청음테스트를 통해 MP3음악과 원본음악을 구분해주도록 요청했다. 가장 잘 맞춘 사람은 현금으로 1000마르크의 상금을 받게 된다. 당초에는 6명의 독자를 초청하려 했으나 응모자가 너무 많아서(1주일새 3백 명 이상의 진지한 응모자가 몰렸다), 12명의 응모자를 하노버로 초청했다. 응모자들은 먼저 자질 심사를 통해 걸러진 뒤, 해당 그룹의 최종 선정은 랜덤하게 이뤄졌다.

우리는 사운드 엔지니어인 Gernot von Schultzendorff 씨에게 심사위원 겸 표준 청음가로서 참가해달라고 부탁했다. Mr.Schultzendorff씨는 하노버에 있는 Deutsche Gramophon(도이체 그라모폰-음반회사: 역자 주)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주로 클래식 음반의 마스터 판을 만드는 일을 맡고 있다. 이 두 번째 실험의 결과를 사전에 예단하기를 바라진 않지만, (실험 결과) 2000년 3월호에 실었던 도표는 여전히 타당하며, 지난번 실험 참가자들이 병원에 가서 청력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음은 미리 밝힐 수 있다.

당시 상황

테스트 장소: 출판사 studio(흡음, 반사, 공명 등의 조건이 오디오 애호가들의 거실과 흡사)
장비: 최고 수준의 오디오 콤포넌트(B&W Nautilus 803 스피커 한 쌍, Marantz CD-Player CD14와 PM14 amplifier) 이러한 조합에는 약 3만 마르크가 들며 소수의 하이파이 매니아만이 갖출 수 있는 장비이다.

덧붙여 Sennheiser 사의 Axel Grell씨가 테스트기간에 Orpheus 정전형 표준 헤드폰과 거기 맞는 튜브 앰프를 제공하였다. 우리가 사용한 장비가운데 가장 비싼 2만 마르크짜리였다.

테스트방법

4분씩
- 임의로 아래와 같은 음악작품 17개를 선정
- 먼저 원본 CD에서 각각 1분 가량의 음악 1절을 들려주고 같은 절의 3개 샘플(128 kbps, 256 kbps, the original)을 불규칙한 순서로 들려줌
- 청음자들은 세가지 샘플의 정확한 소스를 설문지에 기재해야 함
- 128kbps 음원을 맞출 경우 샘플당 1점, CD 음원을 맞춰도 1점을 주고, 세가지 샘플을 모두 맞추면 3점을 주지만, 128k MP3 음원과 CD 음원을 거꾸로 쓰면 (256k 음원을 맞춰도 우연히 맞춘 것으로 보고) 0점 처리함
- 최대 점수는 51점, 아무렇게나 써도 평균 14.1 점이 나오므로 14.1점 이 넘으면 청음 감각이 있는 편임
- CD플레이어와 MP3 player의 DA 변환 특성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차이를 없애기 위해, 테스트 샘플들은 윈도우용 MusicMatch 4.4 로 인코딩하고 , Power Mac G3를 사용, Apple QuickTime Player용 AIFF format으로 바꿔, CD에서 추출한 Audio file과 함께 불규칙한 순서로 하나의 Audio-CD로 구워냈다.

(역자 주: 기존에 “MP3 음질이 CD 음질보다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 원인 가운데는 MP3 플레이어나 거기 딸려 있는 앰프와 스피커 등이 전문 오디오 CD 플레이어와 부속 방비보다 훨씬 값싼 제품이라는 점이 많이 작용했으므로, 이 같은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MP3로 압축한 음원을 다시 비압축 방식으로 풀어-이 경우 파일 크기는 커지지만 음질은 MP3 압축 시와 동일하다-같은 오디오 기기에서 재생하는 것이다)

청음 테스트

30분간 집중적인 청음을 하고 나자 참여자중 일부는 벌써 그만두고 싶어했다. ‘제비뽑기로군’ 하는 말이 여러 번 들렸다. 많은 청음자들은 뛰어난 마란츠 플레이어로 들으면 MP3 음악이 얼마나 멋지게 들리는지에 놀랐다. 사람들은 (불완전한) 청음실의 음향효과가 미치는 영향 같은 기술적 문제나, 그들의 청음 습관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들은 좋은 케이블의 중요성에 대해 토론하거나 아날로그 LP판의 탁월함을 칭찬하기도 했다.(불행하게도 LP판은 청음 테스트를 해볼 수 없었다).

휴식시간 중이나 공동 테스트가 끝난 뒤, 몇몇 잘 모르겠다는 참가자들은 Orpheus 헤드폰으로 다시 듣고 샘플들을 구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한 소절에서 다른 소절로 바로 건너 뛰어가며 비교해볼 수도 있었는데, 이런 방식은 전원이 함께하는 청음테스트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승자

비공식 우승자(역자 주: 청음자가 아닌 심사위원으로서 초청된 사람이므로)는, 총점 26 점을 얻은 우리의 ‘표준 청음자’인 Gernot von Schultzendorff씨였는데, 한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듣고 나서는 지쳐버렸다. ‘힘들었다. 어떤 256 kbps MP3는 CD 원음보다 낭랑하고 더 유쾌하게 들렸다.. 사람들은 이런 특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실상, 사람들은 종종 256 kbps MP3를 original CD라고 잘못 골랐다.

초청된 독자가운데서는, Schopp에서 온 전기공학도인 Mirko Eßling씨가 일등을 차지했다. 그는 응모서류에, 오디오 회로를 보기만해도 그 음질을 예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22점을 땄다. 외국산 음향기기에다, 점수에 대한 압박, 익숙하지 않은 설비, 그리고 최적이랄 수 없는 청음 조건 등을 고려하면 대단히 훌륭한 점수로서 본 대회 1등 상인 현금 1000마르크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대해 다소 놀랐다. “사실상 나는 응모서류에 기재내용을 약간 속였다. 나는 클래식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있지만, 활동적인 아마츄어 음악가로서 즐겨 펑크-락을 연주한다”고 그는 말했다. 테스트에 앞서, 그는 여러 종류의 MP3를 듣는 연습을 했다. 그는 심각한 장애 속에서도 128kbps 엔코딩의 90%를 가려냈다.

“나는 폭발 사고를 겪고 나서는 왼쪽 귀로는 8kHz 까지만 들을 수 있고, 오른쪽 귀는 최근까지도 이명현상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나는 MP3 필터들이 종종 만들어 내는 퍼지는 소리(flanging effects)를 가려낼 수 있으며, 아마도 청각 장애 때문에 오히려 경쟁자들보다 더 잘 구분해 냈을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일 수 있다. MP3의 심리 음향학 모델의 기초는 정상적인 귀를 가진 사람에서 나온 것이다. 8kHz까지만 들리는 사람은 밝은 심벌즈 소리나 트라이앵글의 날카로운 소리는 듣지 못하겠지만, 아마 필터가 만들어낸 낮은 주파수의 정규화 노이즈는 고주파음에 가려지지 않음으로써 들릴 것이다.

MP3 디코더에 적용되는 Sharp notch 필터는 신호가 급격히 변할 때 소리퍼짐(또는 제트 효과)를 만들어 낸다. MP3의 잡티에 특히 민감한 것은 정상적인 청각을 가진 사람보다는 심한 청각 이상자들일 것으로 보인다.

MP3 인코딩 알고리듬의 기저에는 심리음향학적인 마스킹 효과가 깔려 있다. (자명종이 울릴 때도 시계는 계속 똑딱거린다. [그러나 그 알고리듬에서는 똑딱소리는 종소리에 가려지기 때문에 인코딩하지 않는다] 그 알고리듬은 또한 발생된 정규화 노이즈에 대해서도 같은 효과로 대응하는데, 그런 소음은 일반적으로 유용한 소리에 덮이게 된다. 그러나 청각 이상자에게는 그런 소리가 겉으로 드러나면 훨씬 쉽게 감지될 것이다.

공동 2위

Nuremberg 에서 온 Jochen Kähler와 Tom Weidner씨가 각기 20점을 얻어 공동 2위를 차지했고, 함부르크에서 온 Martin Eisenmann씨가 그 뒤를 이었다. Eisenmann씨는 대형 B&W Nautilus 801을 갖고 있으며, 음악에 대한 심취와 최고를 추구하는 성향으로 스테레오 시스템에 4만 마르크를 투자한 사람이다.

Tom Weidner씨는 보청기를 개발하는 엔지니어로서 오디오 신호처리 알고리듬 분야에서 일하고, ‘주로 잡음과 음질 차이를 판별하기 위한 복잡한 사운드 테스트’에 종종 참석한다.

Jochen Kähler씨는 Erlangen에 있는 Fraunhofer IIS(역자 주: 세계 최고의 오디오 코덱 개발사)에서 일할 때 AAC(Advanced Audio Coding)와 기타 MP3의 후속기술에 관한 업무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Hambühren에서 온 Stefan Weiler씨는, 나면서부터 맹인으로서 클래식과 재즈, 그리고 “serious light 음악”의 열렬한 애청자이며, 완벽한 음감을 가지고 ‘Kunstkopf’ 녹음 장비의 개발에 적극 참여해 왔다. [그 장비는 사람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 마이크로폰이 달려 있어서 녹음 시에 더욱 현실감 있는 음향효과를 내기 위한 장비이다] 그는 자기가 고른 것을 함께 온 사람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실수로 4등에 머물렀다. 그가 브라암스의 샘플곡을 실수로 뒤바꿔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역시 20점을 얻었을 것이다. Weiler는 MP3 인코딩된 음악을 주로 “조용한 부분에서 살랑살랑하는 소리의 공간감”이 부족한 점을 이용해 가려낸다고 설명했다.

통계적 관점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로 완벽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음악이 원본과 구별하기 가장 어려운지, 또 어떤 음악을 청음자들이 가장 쉽게 가려내는지를 알고자 했다. 단순히 참가자들의 곡별 점수 합계만 내도 어떤 곡이 원음과 MP3 인코딩된 곡을 가려내기 쉬운지 어려운지를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점수표 참조). 이런 점에서 클래식이 항상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며, 어떤 음악의 경우에는 참석자들이 항상 잘못 고르고는 했다.

예를 들어 그리그의 페르긴트 중 아라비아 춤은 절반이상의 참석자가 원음보다 128kbps로 인코딩된 곡을 선호했다. 압축은 작고 약한, 아마도 목관악기의 거친 소리 같은 것을 제거할 것이다. 반면 On the other hand, 다이나믹하고 타이트한 펑크음악인 Chic의 ‘Jusagroove’ 같은 경우는 대부분의 청음자가 제대로 식별해냈다. 이런 현상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테스트 결과를 추가 분석했다. 우리는 특히 무엇이 차이를 낳는지에 흥미가 있었다.

테스터들은 256k MP3와 128k MP3의 음질을 분간하기 어려워 하는가?, 또는 MP3가 CD 원음보다 더 좋게 들리는가?

이를 알기 위해 평가과정을 약간 수정했다. MP3 음질에 관한 사람들의 편견에 따르면, 사람들은 128 kbps 사운드가 가장 나쁘고, 256K는 그 다음이며, 오리지널 오디오CD 가 최고의 음질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테스트 결과에 다시 점수를 매겼다; 128 kbps로 인식된 샘플에는 모두 1점, 256 kbps로 인식된 샘플에는 모두 2 점, 그리고 오리지널 CD로 인식된 샘플에는 모두 3점을 부여했다.

이 점수는 해당 샘플에 대한 각 청음자의 인식이 옳던 그르던 상관없이 매겨진다. 만약 청음자가 세가지 샘플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모두를 CD 음질로 평가해서 다 3점으로 매긴다. 그리고 나서 각 샘플이 모든 청음자에게서 받은 점수를 더했다. 14명 모두 정확히 맞췄다면, 각 곡들은 그 샘플에 대해 동일한 점수분포를 나타낼 것이다: 128 kbps샘플들은 14점씩, 256kbps샘플들은 28점씩, 그리고 오리지널 CD샘플들은 42점씩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청음자들이 가장 많이 틀리는 곡의 경우에는 MP3 인코딩된 곡이 일반적으로 CD보다 더 음질이 좋은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놀란 것은 128 kbps, 256 kbps, 그리고 CD-ROM 샘플들이 받은 모든 점수를 더했을 때였다. 256 kbps 샘플들과 오리지널 CD 샘플들이 얻은 점수 합계는 완전히 똑 같은 501 점씩이었다. 128 kbps 샘플들의 점수는 확실히 더 낮아서 합계 439점이었다.

통계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501과 439라는 차이는 99% 신뢰수준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이다. (과학적인 조사에서는, 오류 확률이 5%이하면 통계적 편차가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 256 kbps와 CD 샘플은 점수가 똑같으므로 당연히 통계적 차이도 없다.

요약

쉽게 말해, 이번 실험에 참가한 음악적으로 훈련된 청음자들은 저음질의 128kbps MP3는 다른 고음질 샘플과 신뢰할만하게 구별해낼 수 있다. 그러나 256 kbps MP3와 오리지널 CD는 모든 곡에 대해서 차이를 가려내지 못했다. 테스터들이 256 kbps 샘플을 오리지널 CD이라고 고른 회수는 진짜 오리지널 CD를 골라낸 회수와 똑같았다. 이들 숙련된 그룹들에게조차 어떤 128kbps 샘플들은 일관되게 오리지널 CD보다 좋게 평가됐다는 점은 편집자를 놀라게 했다. (편집자도 테스트에 참가했다. 그 점수는 테스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15점밖에 못 얻었음을 고백해야 했다).

압축에 잘 맞거나, 잘 안 맞는 음악 장르는 없다고 선언해도 될 듯 하다. 낮은 비트레이트에서 결과물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기술적인 요소가 있음이 명백하다. 이 기사는 현재 진행중인 MP3 압축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아니다.

유명 상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나 스스로의 신분을 강하게 의식하는 음악애호가들은 아무리 많은 테스트에서 양자간의 음악적 체험은 똑같다고 밝혀지더라도 결코 MP3를 듣지 않을 것이다.

회의론자들은(“그 테스터들은 다 c’t에서 겁먹은 거야; 나 같으면 확실하게 차이를 가려 냈을 텐데”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코더와 CD 라이터기를 구해서-아마도 같은 곡에 대해 비슷한 조건으로-그 자신이 스스로 ‘펩시-챌린지’를 해봐야만 할 것이다.

실험에 사용된 곡 리스트와 평가 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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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약

결론적으로 일반인이 256kbps 이상의 비트레이트를 가진 MP3과 CD음질을 구분하기는 극히 어려우며, 오히려 특정 대역대에 이상이 있는 심한 청각이상자들이 MP3과 CD음질을 쉽게 구분해 낸다.

하지만 유명 상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나 스스로의 신분을 강하게 의식하는 음악애호가들은 아무리 많은 테스트에서 양자간의 음악적 체험이 똑같다고 밝혀지더라도 결코 MP3를 듣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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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abbagom.com/zeroboard/zboard.php?id=Broadcasting&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desc&no=42&PHPSESSID=570d5de5774c1a1fbe7fb9323ad9ca57
원문: http://www.geocities.com/altbinariessoundsmusicclassical/mp3test.html
독일어 원본: http://www.heise.de/ct/00/06/092/

P.S: mp3과 CD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 자료가 더 많으신 분들은 댓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__)



2차 출처: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wtail&logNo=80057035683&categoryNo=0¤tPage=1&sortType=recent&isFromSearch=true

11/21/2011

내가 종교를 보는 자세



한번씩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 다른 종교를 깔보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기독교를 깔보는 경향이 강함. 자기도 종교를 믿고 있으면서)

내가 보기엔 다 병신임.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모든 종교는 없어져야 함.

11/19/2011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승, 유태자본을 해체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승, 유태자본을 해체한다
The Host Enemy among us, Anatomy of Jewish Capitalism

 
Journal by Joon H. Park
Analytic Article by 선악의 사도

단군 박공이 공지한대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의 주 적이 누구인지를 낱낱이 알아보기로 하겠는데요, 일단 들어가기 전에 지난 2차 세계 대전에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자행 되었다고 알려진 유태민족의 대 학살(Holocaust to Jews)이 아직도 사실인양 믿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진실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 세상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본연의 얼굴을 드러내는 법, 그 대학살이 진실은 둘째치고 전혀 사실 무근 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입니다.
당시의 대 학살 극이 발생한 곳은 다들 알다시피 독일 땅 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독일 내에 거주하던 전체 유태인구가 고작 5십만 명 이었음을 알고 계시는 분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러면, 미국과 그 상전인 유태자본이 지난 70여 년간 외친 그들만의 대학살 극에서 희생당한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은 과연 어디서 “급조” 된 걸까요? 
장황하게 제가 뭐라 하는 것보다 이미 이 분야에서 많은 공부를 해오신 몇 분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효과적 이라고 할 수 있어서 아래의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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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당시 유태(대)인 박해 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 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 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재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 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 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 된다(1992년 LA폭동 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 것과, 인도네시아 폭동 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 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 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수용소에 감금 시킨다. 
이쯤 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 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 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 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재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일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 좋은 독일 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이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 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 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Date             Official sources of information                                                                                 Figures
31.12.1945    French Investigation Panel on Nazi-War-Crimes                                                         8.000.000
19.08.1998    Chief Rabbi from Poland (S?ddeutsche Zeitung)                                                         6.000.000
20.04.1978    Le Monde (French daily paper)                                                                                 5.0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5.000.000
20.04.1989    Eugen Kogon, Der SS-Staat (famous book of a holocaust survivor, page 176)               4.500.000
31.12.1952    Der Neue Herder (Enzyclop., Germany) 7th edition (p. 214)                                        4.500.000
01.10.1946    IMT-doc-ument 008-USSR (Nuremberg Military Tribunal)                                          4.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4.000.000
24.11.1989    Chief Prosecutor, Mr. Majorowsky, Wuppertal, Germany (indictment 12 Js 1037/89)    4.000.000
26.07.1990    Allgem. J?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4.0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4.000.000
25.01.1995    Wetzlarer Neue Zeitung (German daily paper)                                                             4.000.000
01.10.1946    IMT-doc-ument 3868-PS (Nuremberg Military Tribunal)                                             3.000.000
01.01.1995    Damals (official monthly magazine on history, sponsored by the Bonn government)        3.000.000
18.07.1990    The Peninsula Times (daily paper, S.Francisco, USA)                                                  2.000.000
25.07.1990    Hamburger Abendblatt (daily paper Germany)                                                             2.0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quoting Chancellor H. Kohl. Minimum of 2 million)         2.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1.500.000
11.06.1992    Allgem. J?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1.5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1.5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3.05.2000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1.09.1989    Le Monde (French daily paper)                                                                                  1.433.000
02.02.1995    BUNTE Illustrierte (German weekly magazine)                                                            1.4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1.2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100.000
27.01.1995    IfZ (Institut for Contemporary History, M?nchen, a government institution)                    1.000.000
03.05.2000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reputed German daily)                                                 1.000.000
31.12.1989    Pressac, Auschwitz, Technique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928.000
27.09.1993    Die Welt (German daily paper)                                                                                      8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750.000
01.05.1994    Focus (German weekly magazine)                                                                                 7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700.000
31.12.1994    Pressac, Die Krematorien ... (2nd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470.000
08.01.1948    Welt im Film (British news reel, nbr. 137)                                                                      300.000
06.01.1990    Frankfurter Rundschau (German daily paper)                                                                   74.000
31.05.1994    Hoffmann, Stalins Vernichtungskrieg (Book on Stalin's war by a renowned German historian, p.302 f.)                                                                                                                                                    74.000
17.08.1994    Intern. Red Cross Arolsen - Department of holocaust investigations (Ref. nbr.: 10824)         66.206
C. 사망원인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 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 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 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D. 독가스 사용 설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 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 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Birkenau and Majdanek, 1988)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 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Jews in Europe - 1938: 8,039,608 - 1948: 9,372,668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안네 프랑크(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 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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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실들을 믿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적 자료들에 의거한 것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내일은 또 다른 증빙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궁금해 할 것이 있을 겁니다.
“그러한, 거대한 음모를 지금까지 감쪽같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어찌 속여 왔는가?”
바로 "정보의 접근 성이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정보에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었고 지금도 역시 이러한 정보들의 주력 신문과 방송 사에 노출이 되지 않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오늘날과 같이 정보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도구인 인터넷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의 유태자본들 에게는 일종의 심심풀이 땅콩 정도의 매우 손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태 식 민주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폐단 입니다. 
돈 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그 돈을 작금 유태인들이 계속 찍어내고 있으며 금(Gold)과 같은 현물 없이 그냥 마구잡이로 찍어내고 있음이 또한 매우 불합리한 것이지요.  돈(Money=Finace) 이라는 것은 현물경제(Spot Economy)과 막 바꿀 수 있는 말 그대로 재화로써의 가치가 입증이 된 만큼만 찍어 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들 유태자본들은 현물 없이 마구 찍어내니 지구 상에 너무 많은 돈이 도는 것이고 급기야는 인플레이트(Inflate) 현상으로 전 세계적인 경제공황 상태를 규칙적으로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플레이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미국의 유태자본이 내세운 카드가 다름아닌 세계 전쟁(Global War) 이라는 것은 머리를 장식이 아닌 그야말로 인간의 중앙처리 연산장치로 들고 다니는 분들 이라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나아가서, 이 들 두 번의 세계 전쟁으로 인해서 가장 많은 반사 이익을 얻은 민족이 바로 유태자본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전쟁을 치르는 두 당사자들을 상대로, 철강, 기름 그리고 달러를 공급하면서 전쟁을 부추긴 것이지요.  모두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패악 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요 내일 또 연관 글 한쪽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고 욕 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1/11/2011

"Murph"



For time:
1 mile Run (1마일 달리기 1600미터)
100 Pull-ups (턱걸이 100개)
200 Push-ups (팔굽혀펴기 200개)
300 Squats (에어 스쿼트(앉았다 일어서기) 300개)
1 mile Run (1마일 달리기 1600미터)

36분 48초

(턱걸이 5개, 팔굽혀펴기 10개, 스쿼트 15개) x 20개 <- 이렇게 해도 됨

느낀점: 아~~~~~~~~~~ 오늘 쫌 힘들었음. 100개 200개 이런거 한번에 못 할 것 같아서 5개 10개 15개 20라운드로 나눠서 했음.  그렇게 하니까 쫌 할만함. ㅋㅋ 내 클래스에서 2등으로 끝냈는데 1등한 사람은 28분대..-_-;; 마지막 1마일 달리기에서는 힘들어서 뛰다가 좀 걷다가 이렇게 했음 ㅋㅋ 솔직히 하기전에 엄청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은 WOD. 아무래도 체력이 좋아진듯! ^.^

11/10/2011

The 10 college majors with the lowest unemployment rates

College students, take note: There are at least six fields of study whose graduates are virtually 100 percent employed right now. That's right--certain majors, such as pharmacology, produce graduates who face a zero percent unemployment rate.
That's not bad considering last month's joblessness rate for people with a college degree or higher was 4.4 percent.
The Wall Street Journal created an interactive tool where users can search for the average employment rate and median income of people who studied each major. The data comes from the Georgetown Center on Education and the Workforce, which released a similar ranking of majors in May that we wrote about here.
The Center's previous study found that graduates with engineering and science majors tend to earn significantly more many than graduates with other college majors. (A petroleum engineering major will make 300 percent more over his or her lifetime than a peer who majored in counseling psychology, for example.)
But narrowing the results down to only the employment rate yields a wider range of fields that provide excellent job security. People who majored in some lower paying fields, such as school counseling, face an almost nonexistent chance of being unempl0yed.
Check out the rest of the most employable majors, below.
Majors and their unemployment rate:
1. Actuarial Science—0 percent
2. Astronomy and Astrophysics—0 percent
3. Educational Administration and Supervision—0 percent
4. Geological and Geophysical Engineering—0 percent
5. Pharmacology—0 percent
6. School Student Counseling—0 percent
7. Agricultural Economics—1.3 percent
8. Medical Technologies Technicians—1.4 percent
9.Atmospheric Sciences and Meteorology—1.6 percent
10. Environmental Engineering, Nursing, and Nuclear Industrial Rad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ies—2.2 per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