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2011

석가의 두 가지 실수

첫번째 실수:
석가(B.C. 563? ~483?)는 인간이 태어나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겪게 되는 온갖 고통과 번민을 일체 면하고, 오직 지극한 즐거움과 행복만을 영원히 향유하며 살 수 있는 방법(길, 道, way)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 세상에서 고생하는 일체(모든) 중생들을 구원해 주어야 겠다는 뜻을 품고 부모와 처와 자식을 버리고 29세에 가출을 하였다. 이것이 석가의 첫 번째 실수이다.
길흉화복(吉凶禍福), 생노병사, 행복-불행, 성공-실패는 인생 그 자체이다. 석가는 근심과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의 삶은 본연의 삶이 아니고, 본래의 삶은 "일체의 고통이나 번민이 없이 오직 기쁨과 행복만을 영원히 향유하며 사는 것" 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삶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하였으므로 석가의 철학은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오해하고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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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실수:
석가는 6년간의 온갖 고행을 한 후에 마침내 그가 찾던 방법을 찾았는데(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일체의 세상적 욕망(특히 성욕)을 버리고,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고,
부모도 섬기지 말고(가출하고),
생업(生業)도 갖지 말고(직업을 가지면  속세에 관련된 욕심과 죄에서 헤어날 수 없으므로),
일체의 살생이나 육식을 하지 않고,
모든 자만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어리석은 중생(衆生)에게 구걸(탁발, 托鉢: 중이 바리때를 들고 마을로 다니면서 동냥하는 일)하여 먹으며,
중생들에게 극락에 가는 법을 가르치면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죄에서 해방되어 윤회(輪廻)의 고리를 탈출해서 영원무궁하고 지극한 행복(닐바나, nirvana)만이 있는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석가는 몸소 자신이 깨달은 법을 실천하며 많은 제자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석가의 두 번째 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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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는 B.C. 500년대에 바나문교(Brahminism, 힌두교)를 믿는 인도의 소왕국(오늘의 부탄 지역)의 태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는 29세 되는 해에 차례로 4가지 환상—노인, 병자, 시체, 방랑하는 성자(승려)—을 보았고 그 일로 인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인간이 겪게 되는 온갖 고통과 근심을 면하는 비법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마침내 그 "비법"을 깨달았는데 그가 비법을 터득해 낸 사유과정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생이 겪는 모든 고뇌와 고통을 면하는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大前提).
2. 모든 고통과 고뇌의 원인은 죄(罪)에 있다.
3. 죄의 근원은 욕심이다.
4. 일체의 욕심을 버리면 모든 죄에서 떠날 수 있다.
5. 모든 죄에서 떠나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사슬을 탈출해서 고통과 고뇌가 일체 없는 완전한 세상(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석가의 사유 방식과 그가 도달한 결론이 참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려면 다음의 6가지 물음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인생이 겪는 모든 고통과 고뇌를 일체 면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2. 인생의 모든 고통과 고뇌는 과연 죄(특히 전생의 죄) 때문에 오는가?
3. 인간이 가지는 욕심(욕망)은 모두 죄가 되는가?
4. 살아있는 인간이 과연 일체의 욕심을 버릴 수 있는가?
5. 윤회의 이론은 참인가? (예: 죄를 지으면 내세에서 짐승, 곤충, 벌레 등으로 태어나는가?)
6. 천국(극락)은 실재하는가?
석가가 찾아낸 결론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6가지 물음에 대한 답이 모두 "그렇다(Yes)"가 되어야 한다. 만약 어느 한가지 물음만이라고 그 답이 "아니다(No)"가 되면 석가의 깨달음과 불교의 모든 이론은 허위가 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필자는 위의 여섯 가지 물음에 대해서 모두 "아니오" 의 답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필자가 삶, 죽음, 인간, 우주에 대해서 석가와는 판이한 사유를 했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과, 불교를 믿지는 않으나 불교를 하나의 고등 종교로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필자의 논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 분의 말씀을 시대와 장소와 각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올시다. (뭘 좀 아시겠소이까?)”
석가의 가르침을 시대와 장소와 입장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관점은 대단히 현명한 생각이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석가의 가르침 중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각자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 융통성 있게 취사선택하고 변형시키거나 위반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는 말이 된다.
불교인들 중에는 평소에 전혀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위반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이 있는데 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불자이고 석가는 위대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 이 세상에는 석가가 누군지, 석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면서도 대체로 선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석가는 융통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석가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에 널리 융통성을 적용하여 대충대충 살아갈 것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다. 석가는 인간들이 적당히 죄짓고,적당히 세상 재미를 보고, 할 짓, 못할 짓 다해보고 나서 죽은 다음에 다시 이 죄많은 세상에 축생(畜生: 소, 돼지, 등 온갖 짐승)이나 버러지로 태어나도 괜찮다고 가르친 사람이 아니다.
석가의 말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여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석가보다 훨씬 더 현명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이 여전히 석가를 인류 최대의 현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거나, 석가를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 숭배하며 그에게 빌기만 하면 세상 욕심을 다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더 할 말이 없다.
불교인들은 석가가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석가는 신이 돼버린지 오래다. 그는 죽자 마자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신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보다 더 전지전능하고, 예수보다 더 자비하고,  빌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다 성취시켜주고, 억조창생을 다 구원해 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도 신은 아니다?  모든 인간도 도를 닦으면 석가처럼 부처가 된다?
불교인들에 설명를 자세히 들으면 석가는 그냥 신이 아니고 “더 신(신보다 더한 존재)”이다.  석가가 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예수가 인간인가 신인가 하는 것과 같은 류의 혼돈이다.
종교인들은 무엇이든 전지전능한 신으로 만들 수 있고 또 그래야 막대한 수입과 권세가 보장된다.  수 천년동안 전문종교인들이 연구해 온 것은 어떻게 하면 어리석을 중생들을 효과적으로 속여서 중생들 위에 영원히 군림할 수 있는가 이다.  독재 사회에서 그들의 독재자를 신격화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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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욕구를 버리면 일체의 근심을 없앨 수 있다.
일체 장을 담그지 않으면 일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말은 맞는것 같지만 이것은 바로 죽음의 철학이다. 일체의 욕구도 근심도 고통도 애증(愛憎)도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명의 가장 솔직한 속성은 끊임없이 더 좋은 것을 원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며 또한 자손을 낳아 대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공과 기쁨도 맛을 보게 되고 또 필연적으로 번뇌와 고통과 실패도 따르게 되며 죽음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와 고통과 죽음은 엄연히 생명의 한 과정이고 따라서 삶의 본질이다. 인생에서 고통과 번뇌를 일체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사기꾼이거나, 살인자(남의 목숨을 강제로 끊는 자) 둘 중의 하나이다.
모든 인생이 고달픈 삶에서  먹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수고와 고뇌는 숭고하고 엄숙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일체의 고통과 번뇌을 피하기 위해 삶의 본질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공연한 내숭이고 위선이다. 불교승들이 제아무리 세상사에  초연한 척 하며 의미심장한 표정과 근엄한 자세로 설법을 하고 선(禪)을 행해도 그것은 오해와 거짓의 소꿉장난이고 코메디일 뿐이다.
그런 고급 기만적 코메디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혼이 나가서 간을 빼주고 쓸개를 빼준다. 아무개 홀 과부가 평생 시장에서 음식점  장사를 해서 번 수백억 재산을 아무개 절에 시주하다... 이런 뉴스는 사실은 슬픈 뉴스이다. 이런 슬픈 현상은 모든 종교에게서 항상 있어온 것이다.  
엄연히 살아 있는 목숨을 가지고서도 속세의 모든 욕망과 즐거움과 고통을 부인하고자 발버둥치는 불교인들의 행위는 겉보기에는 대단히 거룩하고 위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생명의 본질과 우주의 순리를 거역하는 범죄이고 어리석음이며 또 그 차체가 가장 큰 고통과 번뇌를 벌어들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헛된 고통과 소득없는 번뇌는 불제자들이 전문으로 하고 있다.
불교인들이 좀더 완벽한 불제자가 되는 길은 되도록 일찍 죽는 것이다. 인생이 태어나자마자 죽든지, 아니면 어머니 배속에서 죽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죽으면 욕심과 죄와 번뇌에서 완벽하게 해탈(해방)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인다. 
불교인들에게 일찍 죽으라고 충고하는 것은 조금도 실례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죽음이란 또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 조금도 슬픈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불(成佛)하십시요(부처님이 되십시요)!" 라는 불교인들의 인사는 "어서 죽으십시요!"라는 뜻이다. 
석가가 상정한 궁극의 목표는 전(全) 인류가 일체 죄를 짓지 않아서 윤회의 고리를 끊고 천국에 가서 다시는 이 죄많고 고통으로 가득찬 사바세계(娑坡世界: 이 세상, 지구)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석가가 의도한 일이 완성되는 것이므로 불교인들은 좋다고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성적으로 말하면 전 인류가 지구상에서 멸절한다는 뜻이다. 즉 불교의 궁극의 이상은 인류의 멸종인 것이다.
전 인류가 성(性)을 포기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식 새끼를 낳아 기르지 않고, 노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생업을 갖지 않는다면 이들이 일체의 욕심과 죄에서 떠난 것이 되어 이들이 모두 극락에 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구에서 인류가 소멸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삶은 찰나이므로 살아 생전의 모든 즐거움은 덧없는 것이라고 불교인들은 말한다. 꽃은 금시 시들고 부귀 영화도 순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속세의 모든 욕망과 즐거움을 홀연히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한다. 그러한 관점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인생의 즐거움 (특히 성적 즐거움)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면이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두드러진다. 불교인들이 지켜야 하는 열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불교는 즐거음과 행복을 적극적으로 금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의 열가지 계명(戒命; 삼가하고 금해야 할 조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 1 계명: 살생하지 말 것.
제 2 계명: 도둑질하지 말 것.
제 3 계명: 음행하지 말 것.
제 4 계명: 거짓말하지 말 것.
제 5 계명: 술마시지 말 것.
(이상의 다섯 계명은 모든 불자들에게 주어진 계명이고 아래의 다섯 계명은 특별히 전문 불교인<수도승>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제 6 계명: 꽃과 향수를 사용하지 말 것.
제 7 계명: 노래, 춤, 풍류를 즐기거나 보지 말 것.
제 8 계명: 높고 넒은 평상(상석?)에 앉지 말것.
제 9 계명: 공양(식사)때 외에는 음식을 먹지 말 것.
제 10 계명: 금,은 보화 등을 갖지 말 것.
(위의 내용과 약간 다른 십계명도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꽃은 쉬 지므로 될 수 있는대로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는 것이 뜻이 있다. 그러므로써 효과적으로 벌레를 끌어들여 씨앗을 맺고 대를 이은 다음에 안심하고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따라서 우리도 살아서 기력이 있을 동안 되도록 아름답고 행복하고 보람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개인이나 사회나 민족은 지구상에서의 생존권을 다른 현명한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이것이 바로 석가의 가르침의 요체이다.
사탕은 잠깐 단 맛을 준다. 우리는 사탕을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이왕이면 사탕을 먹어보고 죽는 것이 먹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낫다. 죽은 후 극락에서 맛볼 수 있는 일만개의 사탕을 위해서 찰나인 현세의 사탕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는 것이 석가와 불교인들의 손익 계산법인데, 이런 계산은 전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천국을 있다고 믿는데서 범하는 어리석음이다. 그 영원한 손해를 어찌 만회할 수 있으리요. 
불교인들은 인생을 찰나라고 하며 이 세상의 삶을 띠끌과 같이 가볍게 여기는 것이 현명한 태도인양 자랑하지만, 그러나 인생은 찰나가 아니다. 삶은 충분히 길고 지루하다. 인간의 삶이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이 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불교인들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별다른 사고가 없는한 60~ 80년 이상 사는 것이 보통이고, 그 긴 인생 여정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사람구실 을 하기 위해서 온갖 수고와 영욕(榮辱)을 몸으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긴 시간은 우리가 깨달은 척 하면서 "찰나"라고 일축해 버릴만큼 짧은 것이 아니다. 
싫건 좋건 우리는 단 한번 주어진 삶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모든 희로애락, 길흉화복의 사건들을 성실히 견디고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인들이 지어낸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이야기는 인생 고비고비에서 예고없이 닥쳐오는 모든  행운과 불운에 일일히 일희일비 하며 호들갑을 떨고 하나님과 부처님을 찾는 종교인들의 태도에 비하면 훨씬 현명하고 성숙한 삶의 태도이다. 
불행하거나 다행한 사건들은 선한 사람에게도 찾아오고 악한 사람에게도 찾아온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게 살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의 과정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고 선과 악의 행위가 모두 그 댓가나 결과를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은 되도록 선한 삶을 살고자 노력함으로써 불행이나 실패의 정도를 어느 정도 줄이고 행운과 성공의 기회를 어느정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그런 사람은 혹 실패를 해도 이웃이나 지인(知人)들의  도움을 받아서 실패를 만회하고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악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즉 인간의 선행과 악행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보답을 받는 것이지 전생의 업보나, 신의 개입에 의해 상과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삶은 때로 너무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고 지루하므로 거기에 약간의 사탕--사랑, 애정, 오락, 예술, 흥취 등--을 가미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사탕이 잠깐만 달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내버린다면 인생이 너무 쓰고 가엽지 아니한가?
석가가 가르친 말을 곧이듣고 인생의 단 맛을 전부 포기하고 오직 쓰고 위선적인 인생을 살다간 인생이 기하(幾何, how many)인가?  많은 젊은 남,녀 불자들이 석가의 가르침 때문에 생으로 고자 석녀가 되어서 위선과 자학과  죄의식으로 단 한번 사는 세상을 지옥처럼 살다 간다.
자연의 이치로 뜨겁게 흘러넘치는 성욕을 죄악이라고 말해주어 멀쩡한 남,녀를 생으로 고자 석녀로 만들고 일생을 고독과 위선과 죄의식 속에서 살게하는 것은 살인죄 못지 않은 큰 죄라고 본다. 석가는 그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세주인가  몸쓸 죄를 지은 사람인가?  석가는 그들에게 꿇어 업드려 자신이 지은 죄를 억겁을 빌고 사과해도 모자랄 죄인이다. (대개의 종교 창시자들이 이와 같이 인류에게 큰 죄를 지은 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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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의 "윤회(輪廻; Transmigration)" 와 업(業, 갈마: 전생에서 지은 선악의 소행으로 말미아마 현세에서 받는 응보, Karma<범어>)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석가는 불교를 창시하기 전에 힌두교를 믿었었다.
기원전 1500년대에 힌두교를 창시한 인도의 아리안인(Aryans: 인도.유럽 어족계의 백인)들은 윤회 사상을 이집트인으로부터 전해받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 견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 3000년 이전부터 윤회를 믿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1972, Penguin Books) 제 2권에 나타난 이집트인들의 종교 풍습 중 인도의 종교와 유사한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새로 태어나는 다른 동물의 몸으로 들어가는 데 이렇게 육지에 사는 동물, 물속에 사는 동물, 공중을 나는 동물 등 모든 동물의 몸을 일 순회한 다음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며 이렇게 일 순회를 거치는 데 3000년이 걸린다고 믿는다(p. 178).
이집트인들은 많은 동물들을 신과 동일시하여 숭배하고(pp.154-158), 소 (특히 암소)를 가장 숭배한다 (p.145). 
이집트인들은 종교적 이유로 여러 동물들의 살생을 엄격히 금하고 그 고기를 먹지 않는다. 사제들은 머리를 삭발하고(p, 143). 베옷(아마 섬유로 만든 베옷)을 입고(p. 143),사제들의 음식과 일체의 생활 비용은 일반인(중생)들로부터 제공된다 (pp. 143-144).
이집트인들은 연꽃을 신성시 하고 그 씨를 식용으로 즐긴다 (pp. 162-163).

이집트 벽화나 파피루스 문서에 나오는 그림에는 연꽃이 자주 등장한다.
연꽃은 인도와 중국에서도 신성시해왔다 (美 World Book Encyclopedia, 1979 ed. “lotus”). 
이집트인들은 황소는 이시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남은 고기는 연회를 하여 먹었으나 너무 성스러운 암소는 식용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금하는 고기가 많았으나 거위, 물고기, 등 풍부하게 생산되는 육류를 즐기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윤회, 부활 등의 교리를 믿고 종교적으로는 대단히 독실한 사람들이었으나 한편 인생은 한번 사는 것이므로 즐겨야 한다는 실질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투스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집트인들은 연회를 베풀고 회식이 끝나면 한 사내가 약 45cm ~90cm <cm 단위는 필자가 환산한 것임>크기의 나무로 만든 시신을 관에 넣어 이것을 연회에 참여한 여러 손님들을 두루 돌면서 차례로 보여주며 '이것을 보시고 삶을 즐기시오,  당신도 죽으면 이렇게 되리이다' 라고 말한다 (pp. 158-159)."

사실 천국과 극락을 믿는 기독교인들이나 불교인들도  삶과 죽음에 대한 실제 관념은 고대 이집트인들과 다르치 않다. 천국과 극락이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도 병이 나서 좀 아플라치면 다들 약먹고 병원 찾고 기도와 염불로 무병장수를 구하지 않는가?
인도의 힌두교 승려들도 윤회를 믿었고 소(특히 암소)를 대단히 신성시하고 그 밖의 많은 동물들을 신과 동일시 하고 그 고기를 먹지 않으며 머리를 삭발하고 베옷을 입는다. 이렇듯 인도의 힌두교 및 불교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많이 닮아 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고대 여러 민족간의 문화적 교류 및 민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출현한 아리안인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인도 원주민 드라비다인을 정복하고 힌두교를 만들어 낸 것은 B.C. 1500년대이지만, 이들이 인도에 침입하기 훨씬 이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중앙아시아--페르샤 간의 문화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 중에는 혹시 이집트인들이 인도인들의 종교 풍습을 배워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할 가능성은 없는데 그 근거는 헤로도투스의 책에 잘 나타나 있다. 헤로도투스는 역사 제 2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첨가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전통 관습만을 고수하고 외국의 풍습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p. 159).”
“이집트인들은 그리스 풍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 뿐 아니라 모든 외국의 풍습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p.162).”
“그리스의 모든 신들의 이름은 이집트로부터 왔다. 나는 그리스의 신들의 이름이 외국 (특히 이집트)에서 들어온 것임을 조사해서 알았다(p. 149).”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484(?)에 나서 기원전 425(?)에 죽은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이다.  (석가보다 약 80년 늦게 태어났다.) 그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풍물, 전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기록 중에는 오류가 없지 않은데 그런 오류 중에는 그가 범한 오류도 있느나 대부분은 그가  현지인들로 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나 전설을 기록한데서 온 것이다. 그는 기록 중에 “나는 이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지만 나 자신은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도처에 삽입하였다.
이집트는 기원전 4000년 이전부터 역사의 기록을 남긴 민족이고 고대 중동 지역의 국가중에서 가장 풍요하고 (나일강 덕분에), 문명과 과학과 기술이 앞선 문화 선진국이고 군사적으로도 강대국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외국의 문물을 야만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대단히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 기질이 강했는데 이것은 후대에 오히려 이방인들의 발전된 신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뒤져 민족이 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나친 보수적 기질이 가져온 결과이다. 현대 이집트인은 고대 이집트인과 다른 종족이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함인(Hamites)이었느나 오늘날 이집트는 셈인(Semites) 들이고 종교도 언어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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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윤회(輪廻)와 업(業)의 이론은 어떠한가?

전세(前世=전생), 현세(現世), 내세(來世)가 존재해서 그것들이 수레바퀴(輪)처럼 계속 반복 회전하면서 전생에서 지은 선행과 악행이 현세의 운세(운명)를 좌우하고 현세에서 지은 선행과 악행이 내세의 운세를 결정하는 것이 사실일까?
필자는 전생에서 살아본 기억이 없고 전생에서 어떤 선,악의 행위를 하였는지 알지 못하므로 윤회와 업이 과연 불교와 힌두교의 이론대로 운행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판단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간접적인 고찰을 통해서 윤회와 업의 이론을 강하게 회의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 유괴, 납치, 폭행, 강간, 살인, 각종 사고, 지진, 해일 .....등의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불행을 당해야 할 만큼 큰 죄악을 전생에서 범했기 때문에 현세에서 그런 끔찍한 재앙을 당하는 것일까? 윤회와 업의 이론에 의하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또한 살인, 납치, 폭행, 유괴,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전생에서 그와 같거나 유사한 범행을 타인으로부터 당했기 때문에 현세에서 그와 같은 범행을 보복의 차원에서 저지르는 것일까? 윤회와 업의 이론에 의하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만약 윤회와 업의 이론이 참이라고 하면 우리는 온갖 흉악한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나 그런 범행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비난도 동정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전생에서 맺은 "끊을 수 없는 악연(惡緣; 나쁜 인연)"으로 인해 현세에서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고 당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타고 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제 삼자가 나서서 처벌하거나 동정하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고 무슨 정당성(합법성)이 있겠는가?
윤회와 업의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한 문명사회에서 사회를 개선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견지하는 법, 윤리, 경찰, 군대 등은 아무런 존재 가치나 존속 이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윤회와 업의 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아내나 자녀들이 납치, 폭행, 강간, 살인 등의 일을 당하는 경우에는, "아하, 그것은 저들이 전생에서 못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응보로써 받는 댓가로구나! 부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자업자득이니 공평해진 셈이지 뭐!" 라고 말하고 범법자를 체포하거나 처벌하는 노력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현세에서 가난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불구자, 병자의 팔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Marxist-Buddhists, 소위 민중불교인들)은 만약 그들이 부처님을 계속 믿을 생각이라면 정부나 국가나 기업주를 타도하기 위해 각목을 휘두르거나 화염병을 던져서는 안된다 (1980, 90년대의 상황). 왜냐하면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전생에서 무슨 나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세에서 그와 같은 불운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윤회와 업의 진리를 믿는 불교인들은 세상 만사에 대해서 남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일은 불법(佛法)에 의하면 불법(不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 만사가 모두 업과 윤회의 법칙에 따라 한치의 어김도 없이 운행되고 있는데 분통을 터뜨릴 일이 무엇이 있고 분통을 터뜨린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불자들이 분통을 터뜨리다가 도리어 죄를 짓게 되면 내세에 앙화를 당하는 일밖에 더 생기겠는가?
어떤 일, 어떤 처지를 당해서든 불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그저 부처님만 믿겠습니다" 의 뜻)을 외우는 것 밖에는 없다.
또 한가지, 윤회와 업의 이론이 참이라고하면 부모-자식, 조상-후손의 위계질서와 천륜(天倫: 부자 형제 지간의 마땅한 도리)의 가치는 소멸되고 만다. 왜냐하면 윤회의 이론에 의하면 생명은 새로 생겨나거나 죽음이 없이 계속해서 순환되는 것이므로 누가 누구의 부모이고 누가 누구의 조상이라는 개념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이론에 의하면 현세에서의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서는 원수지간 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현세에서 자기 할머니는 내세에서 자기의 딸이 되거나 첩이 될 수도 있다. 윤회와 업의 이론에 의하면 이보다 더 괴상망칙한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면 현세에서 바퀴벌레나 구더기(파리 애벌레)로 태어난 생명이 전생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5대조 할아버지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불제자들이 파리나 모기를 죽여야 옳으냐 살려야 옳으냐의 문제로 번뇌를 하는 이유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회와 업의 이론은 가문, 혈통, 족보, 등의 개념은 물론 인륜, 도덕, 가정, 사회, 상식, 이성, 법, 삶, 생업, 문화, 예술, 전통 등 인간의 삶 일체를 "쓸데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물론 모든 것이 쓸데 없다는 것이 불교의 요지이기는 하지만.

원문 출처: http://atheism.kr/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3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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