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2011

Did Darwin recant?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는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82년 4월 19일에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불신자로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다윈이 죽음 직전에 침상에서 기독교로 전향(death-bed conversion) 하였고 진화론을 포기하였다는 여러 뒷이야기들이 몇 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1882년 5월경부터 설교들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1] 이러한 이야기들은 1881년 가을에 다운 하우스(Down House)[2]를 방문하여 병상의 다윈을 만났었다고 주장하는 호프 부인(Lady Hope)의 말에 의해서 기인되어졌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다윈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가 창세기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는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윈은 그녀에게 다음 날 다시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름 집의 정원에서 열리는 하인, 소작인, 이웃들 30여명이 모이는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 미국 침례교도 저널인 Watchman Examiner (1915년) [3]에 521 개의 단어로 된 기사로서 인쇄되어져 나타났고, 그때 이후로 많은 책들, 잡지들, 소책자들에서 재인쇄 되어졌다.
이 이야기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점은 다윈의 가족들에 의해서 그러한 사실들이 모두 부인되어졌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다윈(Francis Darwin)은 1887년 2월 8일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에게 편지를 썼는데, 찰스 다윈이 죽기 직전 침상에서 진화론을 철회했다는 보고는 “잘못되었으며 어떠한 근거도 없다”[4] 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도 프란시스는 “아버지가 그의 회의론적(agnostic) 관점을 바꾸었다고 믿을만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5] 라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딸 헨리에타(Henrietta, Litchfield)는 1922년 2월 23일 영국의 복음 주간지인 The Christian 의 p.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 시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호프 부인은 아버지의 마지막 또는 어떠한 투병 기간 동안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든지 아버지의 사상과 믿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또는 그 이전에도 그의 과학적 견해를 조금이라도 결코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6]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어떠한 호프 부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다윈의 전기 작가이며, 영국 오픈 대학(The Open University)의 과학사 강사인 제임스 무어(James Moore) 박사는 20여년 동안 3개 대륙에 걸쳐서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그가 ‘다윈의 전설(Darwin legend)’[7] 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조사하여 218 페이지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는 호프 부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1842년 Elizabeth Reid Cotton에서 태어났고, 1877년에 은퇴한 홀아비인 제임스 호프(James Hope) 제독과 결혼했다. 그녀는 복음 전도(tent evangelism) 팀에 몰두했으며, 1880년 대에 켄트(Kent, 다윈의 집이 있던 곳)에서 나이든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곤 했었다. 그녀는 1922년에 호주 시드니에서 암으로 죽었고, 그곳에서 그녀의 무덤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8] 무어는 프란시스와 헨리에타가 거의 확실히 없었던 기간인 1881년 9월 28일(수요일)과 10월 2일(일요일) 사이에 아마도 호프 부인이 찰스 다윈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때 다윈의 부인 엠마(Emma)는 아마도 있었다는 것이다.[9] 그는 호프 부인을 묘사하면서 감동적인 장면과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그리고 감상적인 영성(sentimental spirituality)을 가지고 그것들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숙련된 이야기꾼(a skilled raconteur)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출판된 이야기가 시기와 장소에 관해서 일부 신뢰할만한 세부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실제와 틀린 사실들도 있었음을 또한 지적했다. 즉, 찰스 다윈은 죽기 전에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지 않았으며, 그의 여름 집은 30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포기하거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가 젊었을 때 발표했던 이론들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였고, 종교적 모임에 소수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을 찬성했다는 것이다. 주장되어지는 다윈의 철회/전향(recantation/conversion)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거나,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게 된 장식(embellishments)이라는 것이다. 무어는 그러한 행위를 ‘거룩한 위조(holy fabrication)‘ 라고 부르고 있다!
다윈의 아내였던 엠마는 결혼 생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다윈의 견해가 가지는 반종교적인 본질(irreligious nature)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받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진정으로 발생하였다면, 그녀는 다윈의 전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확증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오늘날 호프 부인의 이야기가 간혹 소책자에 출판되어져서 선의의 사람들에 의해서 배포되어지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References
1. James Moore, The Darwin Legend, Baker Books, Grand Rapids, Michigan, 1994, pp. 113-14.
2. Down House retained the spelling of the old name of Darwin's village, which was changed to Downe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to avoid confusion with County Down in Northern Ireland. Source: Ref. 1, p. 176.
3. Watchman Examiner, Boston, 19 August 1915, p. 1071. Source: Ref. 1 , pp. 92-93 and 190.
4. Ref. 1, pp. 117, 144.
5. ibid, p. 145.
6. ibid, p. 146.
7. ibid.
8. After the death of Admiral Hope in 1881, Lady Hope married T.A. Denny, a 'pork philanthropist', in 1893, but preferred to retain her former name and title (Ref. 1, pp. 85; 89-90).
9. Ref. 1, p. 167.
10. ibid, p. 94.






다윈이 죽기 전에 참회했다고? 레이디 호프의 진실 과학적(?) 사기



인터넷 상에는 아직도 떠돌고 있다. 레이디 호프라는 유령이.
 
다윈이 죽기 전에 '호프 부인(Lady hope)'이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진화론에 대해 후회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에 나오는 레이디 호프(Elizabeth Hope, 1842/12.9 ~ 1922/3.8)는 
자신이 1882년에 다윈이 사망하기 전에 잠시 만나 그와 이야기를 했고, 그가 자신의 진화론을
사망하기 전에 부정했으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1915년에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일가는 이것을 부정했으며, 또한 
"레이디 호프는 그가 최후를 맞을 때, 혹은 한번이라도 병석에 있었을 때도, 단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라고 말했다.
 
이 레이디 호프의 이야기는 흔히 창조설자(Creationist)들에게 '진실' 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큰 거짓말 중 하나이며,
일종의 현대의 전설처럼 취급되고 있다.
 
레이디 호프의 이야기는 미국의 침례교도 신문 'Watchman Examiner'의 1915년 8월 15일호에 실렸으며,
그 저자는 "신실한 영국 여인, 레이디 호프" 라고 알려졌으나 조사된 바 그 실제 저자는 L. G Pine에 의해
엘리자베스 호프라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는 신문에 실리기 전에 1915년 7월 30일, 노스필드의 summer Bible conference에서 
4페이지짜리 리포트로 공개된 적이 있었다.
 
 
---이 문제의 기사의 원문
 
 
[그것은 어느 화창한 가을 낮, 우리가 영국에 있었던 언젠가, 내가 유명한 교수, 찰스 다윈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거의 몇 달 동안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보았을 때 왕립 아카데미에 걸려 있는
그림과도 같은 위엄을 느끼곤 했지만, 그보다 더 굉장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수가 된 부드러운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습니다.
베개에 등을 기댄 채 그는 바깥의 숲과 옥수수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몰에 의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내가 방을 들어설 때 거의 빛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손에는 한참 읽고 있었던 듯, 펼쳐진 바이블을 쥐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내가 그의 침대 곁에 다가가 앉아서 묻자 그가 답했습니다.
 
"히브리서요. 히브리서는 위대한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오. 그렇지 않소?"
 
그는 몇 몇 구절들을 짚으면서 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창조의 역사를 증명하는 많은 사람들의 강한 견해와 창세기의 앞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인정하게 되었소."
 
그는 매우 좌절한 듯했고, 그의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그 때 나는 불확실한 생각들을 손에 쥔 청년이었소. 모든 의문과 암시, 모든 것에 대한 질문들을 내던졌지.
그리고 나도 놀랄 정도로 그것은 들불처럼 퍼져 나가서, 사람들은 그것으로 종교를 만들었소."
 
그는 멈추고, "신성하신 신과 신성한 이 책" 에 대한 몇 문장을 더 읽으며 
손에 쥔 바이블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몇 번이고 쳐다본 뒤 갑자기 말했습니다.
 
"나는 저기에 서른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소."
 
그리고 그는 열린 창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저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이 사람들에게 바이블을 읽어 주길 바랍니다.
내일 낮에 저기에 하인들과 소작인들과 이웃들을 모이게 하겠소. 부디 그들과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소?"
 
"제가 무엇에 대해 말해야 할까요?" 내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웅장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Christ Jesus)!"
 
그리고 낮은 톤으로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희생에 대해서요. 가장 좋은 주제가 아니오? 그리고 당신이 노래를 좀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만약 세 시에 그 모임에 참석해 계실 때 이 창문이 열려 있다면 나도 그 노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오."
 
내가 얼마나 바라왔던 일이었는지! 나는 그 기념할만한 날, 그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빛을 본 것 같았다! ]
 
(본문 끝)
 
 
---다윈의 가족들의 반박
 
 
다윈의 가족들은 모두 이 이야기에 진실성이 없으며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다윈의 아들 프랜시스(Francis)는 1918년 5월 28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아버지의 종교관에 대한 레이디 호프의 주장은 철저한 거짓말(quite untrue)입니다. 
나는 그녀의 거짓됨에 대해 고발했으나, 그 어떤 응답도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불가지론적 관점
(Agnostic point of view)는 나의 "찰스 다윈의 삶과 편지들" 1권 305-314페이지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발표할 자유가 있으며,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1922년 다시 되살아나자, 다윈의 딸 헨리에타 리치필드(Henrietta Litchfield)는
'the christian'의 1922년 2월 23일호의 기사에 서술했다.
 
[다윈의 임종 이야기에 대해 : 나 R. B. Litchfield는 그것을 부정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 때에 함께 있었고, 레이디 호프는 그의 마지막에도, 
그 이전에도 단 한번도 그와 함께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그녀를 만난 적조차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설사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아버지의 생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어느 때에도 자신의 과학적 관점을 철회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미국에서 위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략)
그 모든 이야기들은 단 하나의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958년, 찰스 다윈의 자서전이 다윈의 손녀 Nora Barlow에 의해 재판될 때, 
1887년 아들 프란시스 다윈이 수정했던 문장들이 복원되었다.
이 문장들은 다윈의 신에 대한 관점을 담고 있었고, 
그것은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었다.
 
 
---후대의 개작(改作)과 학문적 연구
 
 
레이디 호프는 이 이야기를 약간 수정하여 'Battlefield of Faith'(1940)의 저자인 S.J.Bole에게 보냈다.
이 이야기는 'Dr Paul Marston's article에 담겨 있니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유명한 현대의 전설이 되었다.  
Ronald W. Clark은 그의 'The Survival of Charles Darwin' 에서 이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다.
'The Darwin Legend'의 저자 James Moore는 레이디 호프가 1881년 10월 2일부터 11월 28일 사이,
아들과 딸들은 없고 부인 엠마만이 있을 때에 몇 번 다윈을 만났었노라고 주장했으며, 이 이야기를
미화했다.
 
'Dr Paul Marston's article'또한 다윈이 침대 대신 소파에 앉아 있었으며, 언제나 바이블을 읽고
있었노라고 내용을 고쳐 썼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는 현대의 창조설자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결론
 
찰스 다윈의 종교관은 복잡했으며, 그의 인생 동안 여러 번 바뀌었다.
그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주로 불가지론과 이신론(理神論)적 태도를 보였으나,
노년기에는 확실히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심장병에 의해 죽음에 이르르게 되었고, 73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망상 증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그는 임종 전날 말했다.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딸 헨리에타는 그의 임종까지 그와 함께했으며, 그가 기독교를 다시 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진짜 유언은, 그의 부인 엠마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부인이었소."
 
 
참조 링크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_Darwin
http://en.wikipedia.org/wiki/Elizabeth_Hope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_Darwin%27s_views_on_religion
 
참조 서적
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한윤진 역, 말글빛냄 / 2006.9, 2007.9(보급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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